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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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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는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로, 기원전 222년 즉위하여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즉위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의 독립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고, 안티오코스는 반란 진압, 동방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를 복속하고, 인도까지 원정하여 '대왕' 칭호를 얻었으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상실했다. 이후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배상금 마련을 위한 원정 중 살해당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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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브르 박물관의 흉상, 아마도 안티오코스 3세의 헬레니즘 초상화 로마 사본
루브르 박물관의 흉상, 아마도 안티오코스 3세의 헬레니즘 초상화 로마 사본
전체 이름안티오코스 호 메가스 (Ἀντίoχoς ὁ Μέγας, "안티오코스 대왕")
출생기원전 241년경
출생지수사, 셀레우코스 제국
사망기원전 187년 7월 3일 (54세)
사망지수사, 셀레우코스 제국
종교그리스 다신교
통치
작위바실레우스 메가스
국가셀레우코스 제국
재위 기간기원전 223년 4/6월 – 기원전 187년 7월 3일 (36년)
이전 통치자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다음 통치자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가족
왕조셀레우코스 왕조
아버지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어머니라오디케 2세
배우자라오디케 3세
칼키스의 에우보에아
자녀안티오코스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아르디스
박트리아의 라오디케
라오디케 4세, 셀레우코스 제국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 이집트의 여왕
안티오키스, 카파도키아의 여왕
안티오코스 4세

2. 즉위 전후

기원전 3세기 중반, 아르사케스 1세가 이끄는 파르티아와 디오도토스 1세의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었고, 아나톨리아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와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 1세가 정복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으며, 헤르메이아스가 그를 보좌했다.

기원전 222년, 메디아 총독(사트라프) Molon|몰론영어, 페르시스 총독 알렉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자네스도 셀레우코스 제국에 불복종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직후 궁정 내 기반이 취약하여 즉시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바빌론에 군단을 집결시켰으나 몰론에게 격파당해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빼앗겼다. 기원전 221년, 안티오코스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티그리스 강변 셀레우키아에 주둔하던 몰론은 안티오코스 3세의 접근에 메디아로 철수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몰론 군의 퇴로를 막고 아폴로니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몰론을 자살하게 만들었고, 알렉산드로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아르타바자네스도 격파하여 아트로파테네 왕국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재확인하고 공납과 군역 의무를 부과했다.

2. 1. 배경과 초기 통치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에 오른 시기의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3세는 헬레니즘 셀레우코스 왕조의 일원이었다.[7][8][9][10] 그는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쿠스 왕과 셀레우코스의 고모인 라오디케 2세의 아들이었으며, 기원전 242년경 페르시아수사 근처에서 태어났다.[11] 바빌론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왕조와 관련 없는 이름(Ly-로 시작)을 사용했을 수 있다. 그는 형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누스가 아나톨리아에서 살해된 후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이었으며, 당시 그는 바빌론에 있었다.[12]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했을 때, 셀레우코스 제국은 위기 속에 있었다. 이미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아르사케스 1세가 이끄는 파르티아와 디오도토스 1세의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었고, 아나톨리아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와의 전쟁이 계속되어 셀레우코스 1세가 정복한 영토는 이미 대부분 상실된 상태였다. 즉위 당시 그는 1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으며, 3명의 왕을 섬기며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던 헤르메이아스가 보좌역을 맡았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222년, 메디아 총독(사트라프)인 Molon|몰론영어(몰론), 페르시스 총독 알렉산드로스 등의 반란이 발생했고,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자네스 등도 셀레우코스 제국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즉위 직후 안티오코스 3세는 궁정 내 기반이 취약했기에, 즉시 몰론 등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반란 진압보다 확대 방지를 중시하여 바빌론에 군단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몰론의 군세에 의해 방어 부대가 격파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범위가 반란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221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몰론의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안티오코스 3세의 접근 소식을 듣고 메디아 방면으로 철수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몰론 군의 퇴로를 막는 형태로 진군하여 아폴로니아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몰론은 자살했고, 알렉산드로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이어서 아르타바자네스도 격파하여 아트로파테네 왕국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고 공납과 군무의 의무를 부과했다.

2. 2. 반란 진압



안티오코스 3세 즉위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기원전 3세기 중반, 파르티아와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었고, 아나톨리아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계속되었다.[13]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 1세가 정복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으며, 헤르메이아스가 그를 보좌했다.

기원전 222년, 메디아 총독(사트라프) Molon영어(몰론), 페르시스 총독 알렉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자네스도 셀레우코스 제국에 불복종했다.[13]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직후 궁정 내 기반이 취약하여 즉시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바빌론에 군단을 집결시켰으나 몰론에게 격파당해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빼앗겼다. 기원전 221년, 안티오코스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14] 티그리스 강변 셀레우키아에 주둔하던 몰론은 안티오코스 3세의 접근에 메디아로 철수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몰론 군의 퇴로를 막고 아폴로니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몰론을 자살하게 만들었고, 알렉산드로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아르타바자네스도 격파하여 아트로파테네 왕국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재확인하고 공납과 군역 의무를 부과했다.[14]

3. 시리아 전쟁과 아나톨리아 원정

확장 전쟁 이후의 셀레우코스 제국


기원전 219년부터 기원전 217년까지 안티오코스 3세는 제4차 시리아 전쟁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의 경계까지 진격했으나, 라피아 전투에서 패배하며 레바논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아카이오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원전 213년까지 그의 미망인 라오디케의 저항까지 제압하며 아나톨리아 지역을 회복했다. 다만, 페르가몬,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왕조는 용인해야 했다.[13]

안티오코스 3세의 은화. 뒷면에는 활과 화살을 든 옴팔로스에 앉아 있는 아폴론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리스어 문구: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 "안티오코스 왕의"가 새겨져 있다.

3. 1. 제4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19년과 기원전 218년의 원정으로 셀레우코스 군대는 거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경계까지 진격했지만,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로 안티오코스 3세의 모든 성공은 무효화되었고, 그는 레바논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13]

기원전 219년, 안티오코스 3세는 나바테아인 등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 지배하의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진군하여 제4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순조롭게 정복지를 확대했지만, 기원전 217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이끄는 이집트군과 라피아 전투에서 맞붙어 70,000명 전후의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완패하여 팔레스타인 지방 확대는 좌절되었다.

3. 2. 아나톨리아 원정

기원전 219년과 기원전 218년의 원정으로 셀레우코스 군대는 거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경계까지 진격했지만,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로 안티오코스 3세의 모든 성공은 무효화되었고, 그는 레바논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13]

이집트에게 패배한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아나톨리아에서 폰토스 왕국의 지원을 받아 자립했던 총독 아카이오스를 타도하러 갔다. 기원전 216년에 서부 아나톨리아로 진군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214년까지 아카이오스를 사르디스에서 몰아냈다. 아카이오스를 생포한 안티오코스 3세는 그를 처형했다. 아카이오스의 미망인 라오디케는 요새에서 기원전 213년까지 버텼으나 결국 항복했다.[13] 이로써 안티오코스 3세는 아나톨리아 방면의 영토를 회복했다.

4. 동방 원정

안티오코스 3세는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누스가 암살당한 후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는 박트리아파르티아가 독립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즉위 직후 미디아와 페르시스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를 진압하고 소 미디아를 복속시켰다.

기원전 219년과 기원전 218년의 원정으로 셀레우코스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경계까지 진격했지만,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에게 패배하여 레바논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서부 아나톨리아로 진군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기원전 214년까지 아카이오스를 사르디스에서 몰아냈다.

소아시아 중부를 회복한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212년부터 동방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르메니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동방 진격로를 확보했다. 이후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차례로 원정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 불리며 '''대왕''' 칭호를 얻게 되었다.

4. 1.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212년, 안티오코스 3세는 조공을 거부한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3] 그는 크세르크세스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고 왕위를 승인했으며, 미납 공납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동쪽의 파르티아로 향했다. 기원전 209년, 파르티아를 침공하여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하고 히르카니아로 진격, 마운트 라부스 전투에서 승리했다.[13] 아르사케스 2세는 평화를 요청하여 협상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우위를 인정하며 "동맹자"가 되었다.

4. 2. 박트리아 원정과 인도 원정

기원전 212년, 안티오코스 3세는 조공을 거부한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209년에는 파르티아를 침공하여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하고 히르카니아로 진격, 마운트 라부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아르사케스 2세는 평화를 요청하여 성공적으로 협상한 것으로 보인다.[13]

같은 해 안티오코스 3세는 박트리아에서 그레코-박트리아 왕 에우튀데모스 1세와 전투를 벌였다.[18] 아리우스 전투에서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승리하였으나, 박트라 공방전에서 셀레우코스 군에 저항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에우튀데모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자신의 딸 라오디케를 주고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왕의 칭호를 유지하도록 허락하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13][19]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카불 계곡을 건너 인도 왕 소파가세누스의 왕국에 도달한 후 세스탄과 케르만을 거쳐 서쪽으로 돌아왔다(206/5).[13]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는 코카서스를 건너 인도로 내려가 인도 왕 소파가세누스와 우정을 갱신하고 코끼리를 추가로 받아 그 수를 총 150마리로 늘렸으며, 그 자리에서 다시 군대에 식량을 공급했다.[19]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원정을 통해 한때 잃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 대부분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고 개선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고 불리며, '''대왕'''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4. 3. 대왕 칭호 획득



안티오코스 3세의 금화 8드라크마. 안티오크에서 주조되었으며(기원전 204-197년), 앞면에는 왕관을 쓴 왕이 묘사되어 있다. 뒷면에는 활과 화살을 들고 옴팔로스에 앉아 있는 아폴로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리스어 전설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 ("왕 안티오코스")가 쓰여 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티그리스 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에서 페르시아만을 따라 아라비아 해안의 게르라인들을 상대로 짧은 원정을 이끌었다(기원전 205/204년). 그는 동부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재건한 공로로 "대왕"(안티오코스 메가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0]

안티오코스 3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기원전 212년부터 시작된 동방 원정이다. 먼저, 아르메니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동방 진격로를 확보했다. 크세르크세스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고 왕위를 승인하며 미납 공납을 면제해 주는 등 회유책을 쓴 후, 파르티아로 향했다.

사막 지대를 돌파하여 히르카니아로 진군,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 2세와 대치했다. 아르사케스 2세는 "매우 용감하게 싸웠다"고 전해지지만, 수도 헤카톰필로스가 함락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우위를 인정하고 "동맹자"가 되었다. 이로써 파르티아 지방에 대한 종주권을 얻은 안티오코스 3세는 바크트리아로 향했다.

당시 그레코-바크트리아 왕 에우튀데모스 1세는 안티오코스 3세 군대의 선봉이 강을 건널 때 기병 공격을 가했다(아리에강 전투). 그러나 선봉군은 후속 부대가 도하할 때까지 버텼고, 주력 부대가 도하에 성공하면서 안티오코스 3세는 승리했다.

에우튀데모스 1세는 수도 바크트라에 웅거하며 철저히 항전했다. 기원전 208년 안티오코스 3세는 바크트라를 포위했는데, 이 포위전은 2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경과에 대한 기록은 흩어져 남아 있다. 기원전 206년 에우튀데모스 1세는 항복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바크트리아의 왕자 데메트리오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장래 왕위를 보장받았다.

바크트리아를 복속시킨 후 인도로 남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 계곡으로 진군하여 그 지방의 왕 스바가세누스를 격파하고 종주권을 인정하게 했으며, 전차 등을 공납으로 징수했다.

이처럼 한때 잃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 대부분에 종주권을 확립하고 개선한 안티오코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 불리며 '''대왕''' 칭호를 얻게 되었다.

5. 제5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패배한 안티오코스 3세는 레바논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13] 이후 소아시아 중부를 회복한 안티오코스 3세는 파르티아를 침공하여 아르사케스 2세와 평화 협상을 맺는 등 제국 동부 재건에 힘썼다. 이로 인해 "대왕"(안티오코스 메가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0]

기원전 205/204년,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이집트 왕위를 계승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비밀 협정을 맺어 프톨레마이오스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이 협정에 따라 안티오코스 3세는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병합하기로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한번 쾨레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를 공격했고, 기원전 198년 요르단강 수원 근처 파니온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대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통치를 종식시켰다.[13]

5. 1. 이집트와의 재격돌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불과 5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파라오로 즉위했다. 이를 호기로 여긴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영토 분할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202년, 준비를 마친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 영토 가자에 침공하여 제5차 시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제4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쟁에서 기원전 200년, 갈릴리 호수 북쪽의 파니온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기원전 198년에는 예루살렘유대인 신전 공동체도 정복했다.

5. 2. 팔레스타인 정복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불과 5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파라오로 즉위했다. 이를 호기로 여긴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영토 분할 협정을 맺었다. 준비를 마친 기원전 202년, 이집트 영토 가자에 침공하여, 제5차 시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4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전쟁은, 기원전 200년, 갈릴리 호수 북쪽의 파니온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기원전 198년에는 예루살렘유대인 신전 공동체도 정복했다.[13]

6. 로마와의 전쟁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로마와 맞서 싸웠다. 그는 소아시아를 거쳐 트라키아까지 진출하며 세력을 넓히려 했으나, 이는 로마 공화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조언에 따라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아파메아 조약을 통해 타우루스 산맥 북쪽과 서쪽의 영토를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6. 1. 로마와의 갈등 심화

안티오코스 3세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소아시아로 이동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 잔재와 독립적인 그리스 도시들에 속한 해안 도시들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계획은 스미르나와 람프사쿠스가 그리스 자유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로마 공화국에 호소하면서 로마의 반감을 샀다.[13][21] 기원전 196년 안티오코스가 트라키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로마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안티오코스에게 기회가 왔고, 망명한 한니발은 그의 궁정에서 그를 부추겼다.[13][21]

안티오코스 3세는 아탈로스 왕조(페르가몬 왕국)나 에게 해 지역으로의 확장을 목표로 했다. 기원전 196년경 트라키아까지 진출했지만, 그리스의 여러 소국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로마 공화정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이톨리아 동맹과 로마는 동맹 관계였으며, 그리스 지방에 세력을 확대하려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와의 대립은 심해졌다.

안티오코스 3세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영향으로 적은 병력으로 그리스에 진군했지만, 로마는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했고, 기원전 191년에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양군은 격돌했다.

6. 2. 테르모필레 전투와 마그네시아 전투

기원전 192년, 안티오코스 3세는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이톨리아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22] 그러나 기원전 191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휘하의 로마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여 소아시아로 물러나게 했다. 로마군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한니발이 시데 앞바다에서 패배한 후,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마그네시아 아드 시필룸 전투 (기원전 190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소아시아는 로마의 손에 넘어갔다.[13]

안티오코스 3세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나톨리아로 철수했다. 이후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로마군과 대치했지만,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6. 3. 전쟁의 결과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패배한 안티오코스 3세는 아파메아 조약을 맺고 로마와 강화했다.[13] 이 조약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은 타우루스 산맥 북쪽과 서쪽의 모든 지역을 포기해야 했으며, 로마 공화국은 이 지역 대부분을 로도스 또는 동맹국인 아탈리드 통치자 에우메네스 2세에게 넘겨주었다.[13] 많은 그리스 도시들은 자유를 유지했다. 또한 셀레우코스 제국은 타국과의 동맹, 포로 획득을 금지당했고, 군비 제한과 더불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13]

이러한 타격으로 안티오코스 3세가 회복했던 제국의 외곽 지역들은 다시 독립을 주장했다.[13] 파르티아박트리아에서는 이반 움직임이 강해졌고, 아나톨리아 방면의 영토도 잃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수사의 신전을 약탈하려 했지만, 현지인들의 반발로 기원전 187년에 암살당했다.[6]

7. 죽음

아파메아 조약(기원전 188년)으로 안티오코스는 타우루스 산맥 북쪽과 서쪽의 모든 지역을 포기했으며, 로마 공화국은 이 지역의 대부분을 로도스 또는 동맹국인 아탈리드 통치자 에우메네스 2세에게 넘겨주었다(많은 그리스 도시들은 자유로 남겨졌다).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이러한 타격의 결과로, 안티오코스가 회복한 제국의 외곽 지역들은 다시 독립을 주장했다.[13] 안티오코스는 루리스탄에서 새로운 동방 원정을 시작했지만, 기원전 187년 엘리마이스, 페르시아에서 신전을 약탈하다가 살해당했다.[6]

8. 점령지 통치

안티오코스 3세는 패배시킨 각지의 왕을 제거하지 않고, 종주권을 인정하게 한 후 왕위를 보장하고 공납과 군역의 의무만을 지게 하는 유연한 정복 체제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전적으로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며, 단기간에 광대한 영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조치로 점령지의 행정 제도 확립이나 산발적인 반란을 진압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점에도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종주권 하의 각 왕들의 권한은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려 시도되었는데, 예를 들어 안티오코스 3세가 딸과 결혼시킨 아르메니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후에 안티오코스 3세의 책동으로 암살되었다.

그러나 영내 각지에 반자립 세력으로서의 왕국을 다수 보존하는 이러한 방침은, 로마에 대한 패배로 군사적 위신이 저하되자, 즉시 정복지의 대부분이 분리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9. 유대인과의 관계

안티오코스 3세는 2,000명의 유대인 가족을 바빌로니아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아나톨리아 지역인 리디아프리기아로 이주시켰다.[25] 요세푸스는 그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며 그들의 충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유대 고대사, 제12권, 제3장 참조).[26] 이는 그의 아들의 태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는 세금을 낮추고, 성전에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의 법에 따라" 살도록 허용했다.[27]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인들이 전하는 몇몇 종교 문헌에서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 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안티오코스 3세를 지원했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도시의 복구, 일정 기간의 면세 특권, 독자적인 법률에 따른 자치를 승인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안티오코스 3세의 대 유대인 정책에 대해서는 그 사료성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왔지만, 최근에는 상당한 과장이나 후세의 가필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료에 부합한다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ntiochus III the Great https://www.livius.o[...] 2020-03-26
[2] 서적 Second Temple studies III: studies in politics, class, and material cultur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3] 서적 Encyclopaedia of the Hindu world, Volume 2 Concept Publishing Company
[4] 서적 The World of Rome: An Introduction to Roman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Cleopatras Routledge
[6] 서적 Encyclopedia of ancient Greece https://archive.org/[...] Routledge
[7] 서적 Handbook to life in ancient Mesopotamia https://archive.org/[...] Infobase Publishing
[8] 서적 A Different Light: The Big Book of Hanukkah https://archive.org/[...] Devora Publishing
[9] 서적 The Cambridge Guide to Jewish History, Religion, and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서적 Syria, Lebanon, Jordan Thames & Hudson
[11] 서적 The Clash of Ideologies Xulon Press
[12] 웹사이트 BCHP 12 (Seleucus III Chronicle) - Livius https://www.livius.o[...]
[13] 간행물 Seleucid Dynasty s.v. Antiochus III. the Great
[14]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15] 문서 Polybius, Histories
[16] 문서 Polybius, Histories
[17] 문서 Polybius, Histories
[18] 웹사이트 Polybius 10.49, Antiochus Engages the Bactrians https://www.perseus.[...] 2021-02-20
[19] 웹사이트 Polybius 11.34, Antiochus Moves from Bactria Through Interior Asia https://www.perseus.[...] 2021-02-20
[20] 문서 Appian, The Syrian Wars
[21] 간행물 Antiochus s.v. Antiochus III.
[22] 서적 A history of the Roman republic Polity
[23] 웹사이트 Antiochus III the Great - Livius https://www.livius.o[...] 2020-03-26
[24] 문서 I. Estremo Oriente
[25] 서적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26] 웹사이트 The Antiquities of the Jews 12:3:3 https://www.sefaria.[...] 2021-12-14
[27] 문서 E. Bickerman, "La Charte séleucide de Jérusalem," REJ
[28] 뉴스 Books - by John Betjeman https://www.britishn[...] British Newspaper Archive 201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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